묘적사는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고승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를 명확히 뒷받침할 만한 고증 자료나 유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적사의 오랜 역사는 여러 문헌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세종실록』, 『연산군일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조선 초기 문헌에 묘적사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당시 묘적사의 사격(寺格, 절의 위상이나 규모)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대웅전 앞에 서 있는 팔각칠층석탑은 그 시대에 조성된 유물로 추정되어 묘적사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창건 이후 조선 초기까지 한때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던 묘적사는 세종 대에 이르러 학열 스님에 의해 대대적으로 중창되었다. 무려 180여 칸에 달하는 대규모 불사를 통해 절의 위상을 되찾았으며, 당시 남북 군영을 세워 무과 시험장으로 활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흥미롭다.
한편, 절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에 따르면 묘적사는 본래 국왕 직속의 비밀 기구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 왕실 신하 중 비밀 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한 사찰을 짓고, 선발된 인원을 승려로 출가시켜 승려 교육과 함께 고도의 군사 훈련을 받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묘적사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되었다. 두 차례의 공격은 간신히 막아냈으나, 마지막 한 번의 맹공을 막지 못하고 결국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대웅전에서 동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는 이제면이라는 인물의 묘와 묘비가 남아 있는데, 이 묘비가 세워진 1720년(숙종 46) 무렵에는 이미 절이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묘적사가 다시 중건되기 시작한 시기는 19세기 말이다. 절에 남아 있는 기록 중 **『묘적산산신각창건기』**에 따르면, 1895년(고종 32)에 규오 법사가 산신각을 중건했다는 내용이 있어 이때부터 사찰의 재건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재건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1969년에는 안타깝게도 화재로 인해 대웅전과 산신각 등이 또다시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불자들의 원력은 여기서 꺾이지 않았다. 1917년(기존 문헌 오류로 1969년 화재 후 중건은 1970년대 이후로 추정되며, 1917년은 다른 중건 시기일 가능성이 높음) 자신 스님에 의해 대웅전과 요사가 중건되었고, 이후 1976년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관음전과 마하선실이 다시 중건되었다. 1979년에는 나한전을, 1984년에는 산령각을 각각 건립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묘적사는 이처럼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재건되며 오늘날까지 그 법등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